여흥민씨 입암공파 대전지역 입향 이야기
- 도룡동, 삼정동을 중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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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충원
입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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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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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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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제인
입암공파 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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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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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여검
운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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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광역시 우성이산 아래 도룡동은 여흥민씨 후예들이 효자정려를 지키며 살아온 세거지로 의정부좌찬성을 지내신 16세손 입암 민제인(立巖 閔齊仁)이 처음 이곳에 정착하였다. 이후 18세손 운촌공(諱 汝儉)이 조부 입암공의 유지를 이어 집과 전답을 일구면서 도룡동 일대 여러 마을이 600여년간 여흥민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가) 우성이산 이야기

< 우성이산에서 바라본 대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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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과 국가자립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헬기를 타고 이곳 도룡동을 날아가다가 불 빛 속에 문득 아늑하고 괜찮다는 느낌이 드는 장소가 눈에 띄었다. 박대통령은 장소를 점찍어 두고, 다음 날 현장을 실사하여 보고토록 하였는데 풍수 보는 사람을 함께하게 하였다. 정찰대는 갑천을
건너고 산을 넘나드는 좁은 길이 있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풍수를 보는 사람은 이곳 도룡리가 명당임을 즉시 알아챘고 이곳이 양반인 민(閔)씨들이 조선 중기부터 터를 잡고, 근처의 삼정동에 걸쳐 살고 있는 집성촌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박대통령과 독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각하, 이곳은 정말 좋은 명당입니다. 각하가 원하시는 과학단지에 두뇌들을 모아 연구하게 하는 장소로는 큰 문(門)에 글(文)이 들어선 민(閔)씨들이 모여사는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민씨로 말하면 4대 양반에 속하며, 조선시대에 4명의 왕비를 배출하였고 여러 정승과 학자들을 배출한 훌륭한 가문입니다. 여흥민씨는 조선 중기 때부터
이곳에 살았고 그 이후로 훌륭한 인물이 계속 배출된 명당입니다. 특히 구한말 세도가들이 어찌 이같은 시골에 계속 자리를 잡고 살았겠습니까? 명당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뜻과도 같습니다.”
이어 풍수 보는 사람의 말이 이어졌다.
“‘도룡골’이라는 곳은 민씨들이 세를 누리고 살고 있으며, 대한민국 명당 중에서 가장 낮은 산에 속하는 계룡산의 명당 줄기가 이곳까지 뻗어 있으며 대표적인 산이 비로 ‘우성이산’입니다.”

<우성이산에서 내려다본 엑스포 한빛탑 전경>
박대통령의 의지대로 대덕과학단지 개발이 시작되어 현재의 목원대문화센터(구 롯데호텔) 뒤편 우성이산을 뚫고 도로를 개설해야하려했는데 민씨들의 훌륭한 분들의 산소가 있어서 민씨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포기하게 되어 조상님들의 안식처가 보존하게 된 것이다.
나) 충효의 가문 여흥민씨
이곳 우성이산 기슭 대덕초등학교 입구 도로변에 여흥민씨 집의공 민충원 재실 왼편에 정려각 4채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 이 정려각은 민평과 민환의 쌍효자 정려, 민병갑의 처 남양홍씨의 효열부가 모셔져 있다.
충효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가문이 바로 도룡동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여흥민씨 집안이다.

<대덕초등학교 입구 영호암 재실>
이를 잘 나타낸 것으로 「오세충효록(五世忠孝錄)」란 책이 있다. 이 책은 민여검(18세)과 그 직계 후손인 민평, 민환(19세) 그리고 민광민(20세), 민경준(21세), 민진운(22세)의 5대에 걸친 충효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충효를 실천한 훌륭한 사람에게 정려를 내리거나 은전(恩田)을 내렸는데 민여검의 후손들이 5대에 걸쳐 포상을 받았다.

<3세7효 정려각>
특히 여흥민씨는 3대에 걸쳐 7명의 효자를 배출하여 삼세칠효(三世七孝)의 가문으로 유명하다. 바로 민평, 민환 형제와 민평의 아들 민광신, 민광민 형제 그리고 민광민의 아들 민원중, 민경중, 민응중 이들을 말하는데 가난하면서도 돈독한 효행과 유자의 덕을 대를 이어 수행해 후세에 귀감이 된다.
삼정동은 지리적으로 대전광역시 대덕구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청호, 서쪽은 용호동, 남쪽은 갈전동, 북쪽으로는 미호동 그리고 서북쪽은 충북 현도면과 접해있는 대전광역시의 행정구역의 이름이다. 삼정동에는 여러 성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살았기에 마을 이름도 성씨에 맞추어 민촌(閔村), 강촌(姜村), 이촌(李村)이라 불리었다. 삼정동은 대청댐으로
수몰 이전에는 금강변을 따라 넓게 발달된 논과 밭이 많아 어려운 시절에도 거지가 없었던 부촌이었다.

<대덕구 삼정동 민수∙민귀손 묘소 전경>
여흥민씨가 대전광역시 회덕 근교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3세 민충원으로 부터이다. 민충원의 부친 민심언은 개성유수를 지냈는데 그의 처 송씨부인(여산송씨)은 원래 이 지역 출신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의 아들 민충원에 의해 송씨부인의 묘소가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에 모셔져 있다. 그 후 민충원은 모친의 묘소 아래 부근에서 거주하게 되어 이 지역의
입향조가 되었고, 민충원과 부인의 묘소도 이곳에 있게 되었다. 여흥민씨의 입향 시기는 민충원의 아들 민수가 1456년(세조 2년)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던 것으로 보아 15세기 전반기로 여겨진다. 그 후 민충원 아들 14세 민수와 손자 15세 민귀손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소가 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에 정해졌고, 이후 이곳이 여흥민씨의 선영이 됨에 따라 후손들이 모여 살게 되어 민촌을 이루게 되었다. 여흥민씨 중 15세 민귀손의 증손이 17세 민여검과 그 직계 후손들은 16세기 이후 회덕에 세거하면서 세칭‘민씨삼세칠효“를 배출하여 효자의
가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17세기 서인계의 핵심을 이루는 21세 민정중과 민유중(인현왕후 父)을 배출하였다. 17세기 회덕 향안에 여흥민씨의 대거 입록은 바로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지금 삼정동에는 민수, 민귀손, 민여검의 묘소가 있다.

< 대덕구 삼정동 입암공손자 민여검 신도비(우암 송시열 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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